닫힌 입술 사이로 울음이 새어 나왔다. 잠에 취해 뜨지도 못한 눈꺼풀 틈으로 눈물이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 연신 손을 들어 닦아 보았지만 닦는 눈물보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더 많은 탓에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내가 ... 잊어가잖아. 꿈 속에서 봤던 남자에게 눈물로 호소하지만 단호하게 말리던 큰 손. 밀어내는 그 손에 떠밀리며 눈이 떠졌다. 꿈이었다. 현실임을 자각하자 순식간에 빠르게 멀어지는 기억에서 현우는 꿈 속의 남자를 다시 떠올릴 수도, 왜 눈물이 났는지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긴 눈물이 볼을 적셨다. 얼굴도. 목소리도. 이유도. 눈물과 같이 하나 둘 휘발되어 결국 슬픔이란 단편적인 마음만이 타고 난 재처럼 남았다. 퉁퉁 부은 눈을 꾹꾹 누르며 방금 전까지 꾸었던 새벽의 꿈을 기억해 내려 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는 파편들은 뿌옇게 낀 안개 속에 있는 듯했다. 어두운 새벽녘에 침대에 홀로 누워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애닳음에 현우는 소리 죽여 울었다.
"...현우야?"
옆에 누워 있던 민혁이 희미한 소음에 눈을 떴다. 제 옆에서 차오르는 울음을 힘겹게 참아내는 현우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옆으로 바싹 몸을 붙였다. 온기가 눈물을 더 끌어내리는 것을 알면서도.
"왜 울어. 응? 너는 꼭 잘 안 울다가 한 번씩 이렇게 섧게 울더라."
"꿈에서 누굴 만났어."
"누구?"
"근데 기억이 안나."
"그 사람때문에 울었어?"
"여기가 너무 욱신거려."
현우는 울음기에 푹 젖어 가라앉은 목소리로 왼쪽 가슴을 꾹꾹 눌렀다. 다 쏟아내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딱딱하게 응어리져 맺혀 있는 것 같았다. 옆에 모로 누워있던 민혁이 현우를 앉히고 너른 등을 쓸어 내렸다. 고여 있는 슬픔이 천천히 내려갔다.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안 나?"
"... 응."
"진짜...? 하나도...?"
"헤어져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만 기억나. 이유도, 얼굴도 하나도 기억이 안나고..."
"근데 그렇게 눈물이 났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더라."
...있잖아, 현우야. 지금 창 밖에 눈 온다.
민혁이 현우의 젖은 볼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민혁은 가끔 제 할 말만 늘어놓을 때가 있었다. 꿈에서 깼으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슬퍼하는 현우를 달래고자, 그의 감정을 조금이라도 환기시켜보고자 민혁은 창 밖에 펑펑 내리는 함박눈의 소식을 전했다. 현우는 조금 걷혀진 틈 사이의 창에 커다란 눈송이가 함부로 내리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현우야. 베개에 눌려 살짝 뻗친 현우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민혁이 현우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눈 오니까 내가 재밌는 얘기해줄까?"
"뭔데?"
"겨울의 전설 알아?"
"...겨울의 전설?"
옛날옛날에. 아주 먼 옛날에.
하늘의 어머니가 생명을 창조하기로 결심했어.
그녀로부터 모든 생명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시작과 끝을 홀로 감당할 수 없어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계절을 만들면서 각 계절을 맡게 할 신을 탄생시켰어.
그리하여 사계절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세상이 순환되게 하셨지.
순서대로 봄이 제일 먼저 태어났고, 마지막으로 겨울이 태어났어.
겨울이 어떻게 태어났냐면 말이야.
현우는 흰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을 창문으로 목도함과 동시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현우의 뻗친 머리 정리를 마쳤는지 민혁은 큰 손으로 현우의 허리를 감싸고 반듯한 어깨에 고개를 뉘인 채, 현우가 보는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민혁의 머리칼이 볼에 닿아 간지러웠다. 곁눈으로 흘끔 내려다본 민혁의 샛노란 머리는 어둠 속에서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났다.
* * *
차갑다. 민혁은 차갑다는 것을 느끼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에 가득 보인 것은 새하얀 하늘이었다. 새하얀 하늘에서 새하얀 눈꽃이 이마에, 볼에, 입술에 축복하듯 차례로 내렸다. 그것이 겨울의 신, 민혁이 가진 태초의 기억이었다.
뒤이어 귓가에서 쿠웅, 쿠웅 울리는 소리는 머리까지 가득 들어찼다. 낮지만 반복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민혁은 눈을 떴다. 본능적으로 이 소리가 자신에게서 나는 소리임을 깨달았다. 차가웠던 감각은 어느새 포근하고 따뜻한 감각으로 바뀌며 온 몸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뿌옇게 보이던 시야가 조금씩 선명해지며 민혁의 눈 앞에는 긴 갈색 곱슬머리의 여인이 보이기 시작했다. 민혁은 한 번 더 눈을 깜빡인 후 축축한 곳에서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민혁은 본능적으로 눈 앞의 인영이 저와 연결된 '무엇' 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숲속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불어와 민혁을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민혁의 첫 숨에 하얀 안개 같은 입김이 서서히 퍼지며 주변의 공기를 바꾸기 시작했다. 민혁의 두 번째 숨에 하늘에서 하얀 눈 꽃 송이가 내리며 민혁의 창백한 손등에 닿았다. 민혁의 세 번째 숨에 몸이 떠오르고 그 아래의 땅이 단단하고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겨울의 신의 탄생이었다.
맨 처음 마주한 풍경과 다르게 변해 버린 하늘과 공기, 땅과 호수를 바라보던 민혁에게 어느새 여인이 다가와 민혁을 끌어안았다. 민혁이 팔을 들어 포근한 품을 마주 안자 그녀에게서 어디선가 그리운 냄새가 났다. 그녀는 민혁을 품에 안고 민혁을 위한 언어를 골랐다.
겨울에 태어난 나의 아이야.
앞으로 네 갈 길이 고요하고 적막할지라도 슬퍼하지 말지어다.
겨울은 만물의 시작, 영원한 희망, 충만한 믿음.
네 존재는 탄생의 근간이 되어,
이별로 연을 매듭 짓더라도 언제나 뒤이어 기쁨이 함께 하리라.
그녀가 말을 하자 민혁의 머리 속에는 자연스럽게 민혁의 형제들인 봄, 여름, 가을과 민혁이 앞으로 맡게 될 겨울의 일이 스며들어왔다. 하늘과 땅, 낮과 밤, 물과 불,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까지. 하늘의 신, 어머니는 그렇게 민혁을 탄생시키며 생명을 창조할 준비를 마쳤다. 말을 마친 후, 그녀는 품에서 떼어 낸 민혁과 부드러운 눈인사를 하고는 희고 작은 빛 하나로 변하며 사라졌다. 민혁은 조금 전까지 손에 닿았던 손길을 잊지 않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얼어붙은 땅 위에 잠시 서서 주먹 쥔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겨울을 만들어야 했다. 그것은 겨울의 신, 민혁이 처음 할 일이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아직 얼지 않은 땅에 눈꽃 모양의 얼음 결정체가 만들어졌다. 민혁의 최초의 흔적은 깊은 숲 속의 폭포가 있는 곳까지 이어졌다.
민혁이 입김을 한번 불면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민혁이 휙 손짓을 하면 무엇이든 얼어붙었다. 민혁이 눈물을 흘리면 눈이 내렸다. 민혁 밖에 없었던 겨울에 시간이 흐를 수록 인내심 깊은 식물과 용기 있는 동물이 생겨났다. 추위에서도 굳건하게 버티며 다음 해의 봄을 기다리는 생명과 그렇지 못한 채 빛을 잃은 생명을 바라보는 것은 세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겨울의 신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수없이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되었다. 어떤 날은 이별에도 덤덤했다가 어떤 날에는 끊임없이 슬펐다. 그럴 때면 어머니와 형제들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내년을 기약할 희망이 있지 않냐며 여린 막내 민혁을 달래고 달래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탄생에 대해 희망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추위에 숨이 사그라드는 생명을 볼 때마다 자신의 존재가 불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의 계절은 민혁에 비해 따뜻했고 찬란했기에 민혁이 가진 고독의 깊이와 쓸쓸함의 온도를 알 수 없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질 때마다 하늘에서는 하얀 눈이 펑펑 내렸기 때문에 민혁의 슬픔은 여태껏 일주일을 가지 못했다. 민혁은 오랫동안 슬퍼할 수 없었다. 자신의 눈물로 내린 하얀 눈을 뒤집어쓴 채 바들거리는 생명을 떠올리면 더는 울 수 없었다. 어린 겨울의 신은 점점 눈물을 참는 법을 알게 되었다.
반복되는 슬픔과 행복에 익숙해지자 어머니가 아끼지 마지 않는 인간들이 태어났다. 봄에는 새싹이 올라오고 여름에는 열매가 맺혔다. 가을에는 풍요를 맛보고 겨울에는 집에 머물렀다. 그들은 겨울 내내 다음 봄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버티었고 이겨내려 노력했다. 민혁도 봄이 제일 좋았다. 거친 겨울을 지나 포근함을 끌어안고 깨어나는 모든 생명이 기특했다. 생명이 다시 피어나는 향기는 싱그러웠다. 그 광경을 보기 위해 민혁은 매번 봄이 오면 만년설로 뒤덮인 얼음산에서 내려와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계절이 수천, 수만번이 바뀌고 인간들이 세상에 익숙해지면서 작고 크게 계절의 신을 기리는 신전도 생겨났다. 겨울을 기리는 신전도 얼음산의 골짜기 아래에 세워졌다. 민혁은 언젠가부터 그 신전에서 겨울을 보내기 시작했다. 깊은 산 속은 인간의 발길이 닿기 힘들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해 만들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신전은 4계절 내내 겨울이었다. 신전의 옆에 흐르던 폭포가 얼어붙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인간들은 겨울의 신이 정말 이곳에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신전 앞에는 하얗고 긴 자작나무가 우거져 숲을 이루고 있었다. 자작나무 숲은 신전을 보호하기 위해 미로처럼 복잡하게 살아 움직였기에 인간이 신전을 찾아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또한 그곳은 무릎까지 푹푹 들어갈 정도로 많은 눈이 내렸고 거센 눈보라로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아 겨울 신전을 찾아오는 인간들은 점점 더 줄어들기 시작했다.
* * *
시간이 아주 오래 지나고 인간들에게 어째서인지 욕심이란 게 생기더니 그것이 마음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소소한 말다툼에서 작은 몸싸움을 지속하더니 종국에는 피 튀기는 전쟁까지 만들었다. 서로를 할퀴고 황폐하게 만들었다. 맑았던 하늘에 검은 연기가 치솟고 살랑이는 산들바람에선 비릿한 피냄새가 풍겼다.
끊이질 않는 전쟁이 여전히 지속되던 어느 날. 복잡한 숲의 미로와 거센 눈보라를 뚫고, 쌓인 눈에 무릎이 푹푹 꺾이며 몇 번이고 넘어지면서 신전에 한 인간이 도착했다. 품에는 찢기고 해진 이불에 돌돌 둘러 쌓인 아기를 품에 안은 채였다. 여자는 아기를 안고 두리번거리며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보다 춥지는 않았지만 제단 위에 원형으로 뚫려 있는 천장에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은 따뜻함을 느끼지 못할 곳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는지 여자는 다리를 절뚝이며 제단 앞으로 향했다. 제단 위는 하늘에서 내린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추위에 거칠고 부르튼 손으로 제단 위의 눈을 치우고 그 위에 아기를 눕혔다. 아기는 작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겨울 신전은 언제나 추웠으므로 이대로라면 아이와 여자는 죽을 확률이 높았다. 민혁은 그 모습을 신전 기둥 뒤에 몸을 감추고 모든 것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를 살려주세요. 여름의 신의 가호를 받은 아이입니다. 제발…"
여자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겨울의 신에게 애원했다. 여름의 신이 가호를 내렸다고? 신은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지만 그걸 깨고 여름의 신이 인간의 생명을 위해 무언갈 해주었다는 이야기를 지금 여자가 하고 있었다. 여름이라면 그런 일을 멋대로 벌였을지도 모른다. 여름은 네 계절 중에서도 열정과 사랑이 만개한 계절이었다.
민혁은 천천히 기둥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여자와 아기가 있는 제단으로 걸어갔다. 여자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구슬피 울었지만 여자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뭇한 먼지로 뒤덮인 얼굴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눈물 자욱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며 여기까지 당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여자는 무릎 꿇고 눈을 감은 채 어디 있는지도 모를 민혁을 향해 정신없이 기도를 하고 있어서 민혁이 그녀의 앞에 나타났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민혁은 제단 위의 아이를 천천히 들어올려 품에 안았다. 소리 하나 내지 않아 마냥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아이가 민혁의 품에 안기자 사르르 눈을 떴다. 아이의 눈동자에는 여름이 내린 햇살이 한 톨 박혀 있었다. 갈색의 눈동자에서 민혁은 반짝이며 빛나는 뜨거운 여름 한 조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여름의 가호를 받았구나."
신음하듯 기도하던 여자의 시선은 선명한 목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새하얀 머리와 은빛으로 빛나다 못해 푸르게 보이는 눈동자. 여자는 겨울의 신을 올려다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기는 매우 작아 민혁이 한 손으로 안기에도 충분했다. 손바닥에 전해오는 온기를 민혁은 처음 느꼈다. 따뜻하다. 민혁은 하늘의 신, 어머니와는 다른 따뜻함에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양 손 가득 아이를 안아들자 아이의 반짝이는 눈빛이 민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민혁은 제 운명이 새로운 운명의 갈림길에 접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민혁은 여자를 향해 말했다. 아이를 거두겠노라고. 이것이 어떤 여정의 시작일지 모르지만 스러져가는 생명만을 봐 온 겨울의 가운데에서 제 손에 닿은 이 생명만큼은 지켜내고 싶었다. 억겁의 시간을 지내는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무이한 선물이라고 민혁은 감히 생각했다. 넓고 넓은 세상에서 작은 인간의 아이쯤은 제가 가져도 되지 않을까.
여자는 감사하다며 읊조리며 민혁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를 향해 한발 한발 내딛었다. 아기를 여자에게 건네자 여자는 아기를 끌어안은 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댄 채 하염없이 사랑한다 말했다. 그리고 다시 민혁에게 건네고 허리를 숙여 마지막 감사 인사를 했다. 여자는 자신의 손을 떠난 아이를 뒤로 한 채 절뚝이는 걸음으로 신전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아이는 잔혹한 전쟁과 얼어붙은 겨울의 틈 사이에서 살아남았다.
* * *
겨울 신전은 일년 내내 춥고 눈이 내렸다. 그러나 여름 신의 가호를 받은 아이는 겨울 신전에서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자그마한 아이의 앓는 모습을 보는 걸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괴로웠다. 아이를 민혁은 셔누라 불렀다. 무엇보다 건강함이 우선이라 생각한 민혁이 sanus 사누스 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너무 어린 아이는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짧은 발음으로 쇼뉴, 사뉴를 따라하더니 어느새 셔누로 부르고 있었다. 민혁은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셔누와 함께 있는 순간부터 겨울이 더이상 슬프지 않았다. 건강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민혁은 매일이 감탄스러웠다.
매번 홀로 맞는 겨울이 아이로 인하여 얼마나 많이 바뀌었던가. 바뀐 것은 사실 없었지만 민혁은 아이와 함께 하는 겨울로 인하여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제대로 된 겨울을 마주볼 수 있었다. 겨울은 생각보다 따뜻했고 즐거웠다. 아이는 밖에서 노는 것을 좋아해 눈밭에 뒹굴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눈가루를 맞았다. 눈으로 덮인 언덕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썰매를 탔고 눈사람을 만들다 손이 벌게진 아이의 양 손에 새하얀 털장갑을 끼워 주기도 했다. 뾰족한 얼음을 손에 들고 입술로 할짝이며 맛볼 수 있다는 것을 민혁은 아이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아이와 겨울 숲에서 놀 수 있는 것들은 너무도 많았다. 차갑기만 했던 눈과 얼음이 이리도 즐거울 수 있다니. 민혁은 아이의 긴 속눈썹에 살얼음이 살짝 껴 있는 것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톡톡 털고 발갛게 부르튼 양 볼을 큰 손으로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추위를 덜 타는 여름의 아이에게서 뜨거운 열기가 넘실거렸다.
겨울의 신은 때로 올빼미였다가 순록이었다가 늑대이기도 했다. 새하얀. 겨울 신전을 찾는 인간들을 감시하고 숲에서 헤매이는 인간들에게 종종 도움을 주기도 했다. 민혁이 며칠씩 낮과 밤을 지새우고 새하얀 동물로 몸을 바꾸고 돌아오는 모습을 셔누는 몇 번이나 목격했다. 인적 하나 없는 신전에서 두껍게 쌓인 눈을 사르륵 밟는 소리는 신전 입구 기둥 옆에서 잠이 들었던 셔누가 제일 기다렸던 누군가의 발걸음이었다. 민혁은 셔누가 처음 마중 나왔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릎까지 왔던 작은 아이가 민혁이 입혀주었던 두터운 겉옷을 걸친 채 신전 입구 계단에서 쌓인 눈을 손바닥에 한 움큼 놓고 입으로 후 불어 작은 눈송이를 만들었던 그 날을. 흩어지는 눈송이 사이로 흰 늑대의 모습을 한 민혁을 발견하고 셔누는 놀란 기색도 없이 손을 흔들었다. 민혁임을 알고 있다는 듯이. 민혁은 그만큼 따사로운 겨울은 느껴보지 못했다.
계절의 신은 각자가 맡은 계절 외에는 인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민혁도 마찬가지였다. 셔누와 함께 첫 겨울을 지나고 봄이 다가올 때쯤 민혁은 아이와 함께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니며 봄, 여름, 가을을 지냈다. 처음 겨울 이외의 계절을 마주한 아이는 어떠했는가. 민혁은 아이의 손길이 닿는 모든 것들이, 아이의 발 밑에서 즈려 밟히는 땅과 풀이 그렇게 빛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아이는 폭신한 잔디밭에 누워 하늘의 구름을 보며 햇빛을 만끽했다. 더운 여름 날에는 연갈색의 바지가 물에 젖어 짙은 색이 되어도 환히 웃으며 물장난을 치는 아이를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보는 것이 낙이었다. 쏟아지는 빗 속에서 젖은 땅을 첨벙거리며 놀아도 아이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했다.
모든 것이 반짝였다. 민혁은 넘쳐나는 생명을 지금까지 봐 왔으면서도 이토록 빛나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찬란한 세계가 지속되길 바라며 민혁은 인간의 아이에게 자신의 영원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떼어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인간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서로에게 모든 것의 처음이 되어 준 존재가 영원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서글퍼졌다. 겨울처럼 말간 민혁의 얼굴이 수심에 잠길 때가 잦았다.
열매가 맺힌 가을에 민혁에게 주겠다며 기어코 올라간 나무에 허벅다리가 죄다 쓸려 빨갛게 상처 입은 채 달콤한 향이 나는 사과를 건넸을 때 민혁은, 순간 겨울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뜻을 한 번도 거스른 적 없는 민혁은 겨울 속에서 아이를 가두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겨울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스러졌던가. 심판은 저의 몫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민혁은 불씨가 꺼지는 생명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나 둘 씩 눈이 덮여 땅으로 돌아가는 생명들을 지켜보며 민혁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가끔 신전에 찾아오는 인간들도 겨울이 두렵다 애처로이 울부짖지 않았던가. 다른 계절에 인간의 모습을 한 민혁이 셔누와 함께 장터에 나설 때면 겨울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투덜대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기도 했다.
민혁은 아이가 겨울의 슬픔을 보고 겨울을 향한 투정을 듣는 것이 싫었다. 아이에게만큼은 좋고 반짝이고 따뜻한 것만 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민혁은 겨울 신전을 뒤로 하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깊고 깊은 숲 속으로 셔누의 작은 손을 잡고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 묻는 셔누에게 민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셔누는 그 미소가 무척이나 마음을 시리게 만들어 더이상 민혁에게 어떤 물음도 던지지 못하고 그를 따라 나섰다. 민혁은 자신이 태어났던 곳으로 향했다. 단단히 얼어붙은 땅과 그 옆의 두터운 얼음으로 뒤덮인 호수를 녹이고 잔디가 무성한 평평한 대지 위에 오두막 한 채를 지었다. 화려한 색채의 꽃과 과일 나무도 심었다. 겨울 신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화사함이 호숫가에 피어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혁은 아무도 오두막을 찾지 못하게 장미 나무와 덩굴로 주변을 휘감았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올거라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겨울이 오지 않았다.
겨울이 사라졌다.
사라진 겨울 속에서 사람들은 의아해했지만 더는 춥게 지내도 되지 않는 다는 사실에 기뻤다. 겨울을 나는 것은 버겁고 위태로웠기 때문에 겨울이 오지 않자 사람들은 그 빈자리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겨울이 사라져도 민혁을 찾아 겨울 신전에 오는 인간은 없었다. 그렇게 오래도록 겨울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천천히 세상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열매는 차고 넘쳐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나무는 주저할 새도 없이 쑥쑥 자라 햇빛을 가리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더이상 부지런히 무언갈 하지 않아도 넘쳐나는 곡물과 열매로 게을러졌다. 가진 것을 함께 나누고 버팀목이 되었던 이웃들은 무료한 일상이 지속되자 서로가 가진 것을 자랑하고 끊임없이 비교하기 시작했다. 헐뜯고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욕심이 흘러 넘치고 배려가 사라졌다. 서로를 해치고 심지어는 죽이는 일도 빈번해졌다. 피로 물들이는 전쟁이 또다시 시작되었다. 겨울을 항상 안쓰럽게 여겼던 봄, 여름, 가을은 곧 돌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고 민혁을 기다리며 버텼지만 예상보다 길어진 부재에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을 맞이하자 겨울을 찾아 나섰다.
* * *
가을이 끝나면 봄이 시작되었다. 겨울 없이 반복되는 세 계절을 민혁은 꽤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었다. 그동안 아이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부신 열 여덟의 소년으로 성장했다. 금세 커버린 셔누는 이제 민혁의 눈과 마주할 정도가 되었다. 한 손으로도 안아 들었던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 자라났을까. 민혁은 셔누와 함께 했을 때부터 한 번도 세지 않았던 시간을 셌다. 제겐 늘 무한히 주어졌던 시간이었기에 시간을 보는 것조차 특별하게 생각되었다. 인간의 유한한 시간이란 황홀하면서도 무서웠다. 언젠간 필연적으로 맞이할 이별이 너무도 갑자기 혹은 빠르게 다가올까 두렵기 시작했다. 민혁은 지금 이 순간을 눈부시게 바라보면서도 셔누가 자신을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매일이 행복했지만 그만큼 괴로웠다. 소년은 이런 민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진스러운 눈빛으로 오두막 뒤편의 그늘진 곳에서 풀밭을 뒤적거리며 무언갈 찾고 있었다. 소년에게서는 유록의 향이 짙게 풍겨 바람에 날렸다.
"무얼 찾고 있어."
셔누의 등 뒤에서 민혁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년은 말없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소년의 손에는 진한 초록의 네잎 클로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네잎 클로버를 또 찾고 싶어요."
민혁은 고개를 끄덕이고 소년의 옆에서 허리를 숙여 토끼풀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는 뒷마당을 들여다보았다. 민혁은 사실 열심히 찾는 척을 하며 선이 굵어진 셔누의 옆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소년은 네잎 크로버를 찾는 데에 집중한 나머지 통통한 입술이 부루퉁하게 나왔다. 그 입술을 보고 민혁은 작게 웃었다.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하나에 몰두하면 입술을 툭 내미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민혁은 셔누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걸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쳐 소년이 슬몃 웃기라도 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저릿했다. 한참을 풀을 뒤적거리던 셔누는 민혁에게 그쪽에도 없는지 물었다. 민혁은 손으로 휘휘 젓는 시늉을 하며 여기엔 없다고 대충 둘러댔다. 찾는 네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찾을 새도 없었다는 말은 삼키기로 했다. 허리를 숙이고 찾느라 힘들었는지 셔누가 풀밭 위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땅을 짚은 셔누의 왼손에 길게 하얀 토끼풀꽃 줄기가 만져졌다. 잠깐 무언갈 생각하던 소년은 토끼풀꽃 줄기를 뜯어 둥글게 엮더니 무릎 걸음으로 민혁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손."
"이게 뭔데?"
셔누가 가만히 제 손에 들린 것을 보고만 있는 민혁의 왼손을 잡았다. 쿠웅. 쿠웅. 태어났을 때 귓가에 들렸던 심장 박동 소리가 발 밑부터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셔누와 맞닿은 손에까지 진동이 들릴까 손을 빼내려 했지만 셔누가 손목을 꽉 잡고 있어 뺄 수가 없었다. 둥근 매듭이 약지에 스치며 끼워졌다. 민혁은 네 번째 손가락에서 달랑거리는 엉성한 꽃반지를 보며 손가락을 쫙 뻗어 보기도 하고 코에 갖다 대며 향기를 맡아보기도 했다.
"전에 같이 장에 갔을 때 들은 건데요. 토끼풀의 꽃말은 약속이래요."
셔누는 지난 주 하얀 강아지로 변한 민혁을 품에 안고 마을 장터에 갔을 때를 떠올렸다. 셔누의 키가 민혁의 무릎 정도 오는 나이였을 때까지 말수가 적어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 있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자주 데려갔던 장터였다. 오랜 시간이 흐를 수록 셔누와 사람들은 모습이 점점 변했지만 민혁은 그대로였기에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해, 어느 순간부터 민혁은 사람의 모습 대신 동물로 몸을 바꾸어 함께 장터에 갔다. 그날은 단단하지만 따뜻한 소년의 품에 안겨 민혁이 고롱고롱 잠이 들었던 날이었다. 조심스러운 걸음이었지만 작은 움직임에도 민혁이 깰까 걸음이 더뎌졌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서 셔누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토끼풀과 반지 이야기도 그 중 하나였다. 장신구를 파는 가게를 지나며 사랑의 혈관이 지나가는 왼손 약지에 사랑의 정표를 선물하라는 이야기. 꽃가게를 지나며 흔해 빠진 토끼풀의 꽃말이 약속이라는 이야기도. 사랑. 약속. 순간 은백색의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이며 환하게 웃는 민혁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마음이 울컥하며 목까지 열이 올라왔다. 두근거림이 볼에서 가슴으로 조금씩 퍼져 나갔다. 품에 잠든 작은 민혁이 흔들리는 호흡을 눈치챌까 부러 빠르게 걸었던 날이었다.
"역시, 별로죠? 너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같기도."
"아니. 맘에 들어. 그동안 받은 것 중에 제일."
만드는 요령이 없어서 계속 만지작 대는 바람에 꽃줄기가 이리저리 휘어 물렁해 지고 꽃대가 흔들거렸다. 민혁은 약지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한 송이 작은 꽃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셔누는 너무 바보같은 선물이라 생각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더 예쁘게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년의 아쉬워하는 마음을 모르는 민혁은 반지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가락을 붙인 채 새파란 하늘에 자랑하듯 내밀었다. 제 손이 제일 반짝였다. 겨울 신일 때 당연히 화려하고 진귀한 선물들을 많이 받아 보았지만, 오로지 민혁 자신만을 위한 선물은 처음이었다. 어머니의 손으로부터 태어나고 오래도록 세상에 있었지만 겨울의 신이 아닌 '민혁'만을 위한 첫 선물은 아이가 건넨 고개가 고꾸라진 토끼풀 반지였다. 민혁은 매듭이 풀려 버릴까 어정쩡하게 팔을 들고 다른 팔로 아이를 끌어안아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평생 함께 있어주겠다는 약속. 너를 지키겠다는 약속. 민혁은 그렇게 아이를 끌어안은 채 한참을 서 있었다.
* * *
꽁꽁 숨겨 놓은 오두막에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세 계절의 신이 보낸 사자들이었다. 기다림이 한계에 다다른 신들은 각자의 신전에서 가장 정의롭고 순수하며 선한 이들에게 계시를 내리고 겨울의 신에게 보냈다. 그들은 긴 여정에 지치고 뾰족한 가시에 긁히고 다치면서도 그들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풀지 못하도록 감아 둔 덩굴을 기어코 걷어내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것은 잔잔하고 반짝이는 호수와 소박한 오두막 한 채뿐이었다. 피와 눈물뿐인 바깥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의 한적한 그곳에 세 사람이 도착했다. 똑똑. 이른 아침 새벽 이슬이 떨어지기도 전부터 들이닥친 소음에 민혁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누구지."
"... 겨울의 신께 인사 드립니다."
문이 열리고 은백색의 머릿결의 민혁을 마주하자 세 사람은 바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신에게 인사를 올렸다. 민혁은 다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자신이 쳐 놓은 덫을 뚫고 인간이 들어올 수는 없었음에도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세 계절의 신이 자신을 부르기 위함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침대에 누워있던 소년이 눈을 뜨고 민혁의 곁으로 왔다.
셔누는 새로운 사람의 방문에 몹시 들뜬 모습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오두막에 사람이 방문한 것은 이들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민혁은 매서운 표정을 지우고 세 사람을 오두막 안으로 초대했다. 탁자에 그들과 마주앉은 세 사람은 같이 있는 소년과 민혁의 눈치를 보며 겨울의 신이 필요하다 청하고 있었다. 민혁은 주저도 없이 거절했다. 돌아가지 않아. 세 사람은 지금 밖의 상황이 얼마나 피폐하게 변하고 있는지 민혁에게 낱낱이 알려주었다. 겨울이 오히려 싫다고 빌었잖아, 너희들. 바람 대로 사라져줬는데 왜. 소년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민혁의 낯선 얼굴을 보았다. 매번 따스한 눈빛을 보내던 민혁의 은빛 눈동자에서는 형형하다 못해 푸른 빛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셔누의 걱정 어린 시선을 느낀 민혁이 굳은 얼굴을 풀고 세 사람에게 차를 내오겠다며 부엌으로 향했다. 세 사람은 탁자에 홀로 남겨진 셔누를 붙잡고 민혁이 원래 있던 신전으로 돌아 가야한다고 도와 달라 부탁했다. 셔누는 민혁의 뒷모습을 한번, 사람들의 핼쑥해진 얼굴을 한번, 번갈아 보았다. 소년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이유를. 민혁과 함께 겨울 신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세 사람을 돌려보내고 민혁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평소와 같이 행동했다. 아침에 일어나 따뜻한 차를 끓이고 호수에서 첨벙이며 뛰어드는 셔누를 구경했다. 잔디밭에 나란히 누워 폭신한 구름이 느긋하게 지나가는 것을 봤다. 평화로웠다. 세상이 어떻게 멸망해가는지 민혁은 알고 싶지 않았다. 그깟 세상 따위 나락으로 떨어져버려도 상관없었다. 차라리 끝나버리라지. 그러자 깊은 마음 어딘가에서 눈밭에서 하얗게 웃던 아이와 겨울을 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던 동물들, 나무 끝에 몽우리 진 꽃망울이 떠올랐다. 민혁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돌아가지 않아. 아무도 듣지 않을 다짐을 속으로 되뇌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연속이었다. 밤바람을 맞으며 민혁은 호숫가를 거닐었다. 보름달이 환히 빛을 발했다. 민혁이 손바닥 위로 입김을 후 내뱉자 반딧불이 크기의 눈송이가 흩날렸다. 달빛 아래에서 눈송이들이 별처럼 빛났다.
며칠 후, 셔누는 장에 다녀오기로 했다. 민혁은 같이 가겠다며 따라 나섰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민혁의 불안한 마음이 더욱 흔들릴 것 같기에 셔누는 혼자 갔다 오겠다며 민혁을 다독이고 채비를 하고 나섰다. 민혁의 손끝이 들리자 가시덤불이 갈라지며 오솔길을 내보였다. 셔누는 민혁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시장에 도착한 셔누는 마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전쟁으로 인한 척박한 삶 속에서도 그나마 정겹게 느껴지는 사람들이었다. 셔누는 오두막에 사람들이 방문했던 이후로 민혁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래서 민혁을 위해 불면증에 좋다는 차와 입맛을 돋울 케이크를 준비하기로 계획했다. 어릴 때 민혁과 함께 케이크를 만들어봤던 기억을 되짚으며 만들어 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빠뜨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계속 머리 속에서 생각하느라 셔누는 주변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들리지 않았다. 자신 주변에서 웅성거림이 심해지고 적대적인 시선이 계속 닿았다. 누군가는 길을 지나가며 어깨를 치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사람들의 태도가 낯설고 불쾌했다. 마지막으로 들른 가게에서 밀가루를 사서 나오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저 자식 때문이래. 지금 우리가 이꼴인 게. 겨울이 없어지게 된 게. 모두 다!"
"얼마 전에 낯선 사람들, 그래! 그 이방인들이 겨울을 찾으러 왔던 거래!"
"저 녀석이 겨울을 감추고 있었던 거야!"
자신을 향해 분노가 가득 찬 목소리들이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들이 셔누의 주변을 좁혀 오기 시작했다.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지만 악의를 갖고 대한 적도 없었다. 그랬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고 악에 받친 목소리와 함께 달려들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셔누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쌓여 있던 울분을 터트리며 셔누를 향해 겨울을 돌려내라 외치기 시작했다. 몸이 밀쳐지고 팔과 얼굴에 빨간 생채기가 그어졌다.
"제물로 삼아야 돼!"
또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 이 녀석을 제물로 삼아 하늘의 신에게 바치는 거야. 그럼 우릴 좀 굽어살펴 주시지 않겠어?"
반대편의 누군가가 뒤이어 말했다.
셔누를 둘러싼 모두가 한 마디씩 거들었다.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들이 셔누의 양팔을 잡았다. 억압하려는 손길에 몸을 뒤틀자 여기저기에서 손들이 더 튀어나와 옭아매기 시작했다. 거센 몸짓에 손에 쥐고 있던 밀가루 봉지가 바닥에 떨어지고 하얀 가루가 군중 속에서 휘날렸다. 그 장면이 마치 눈폭풍이 몰아치는 것 같다고 셔누는 생각했다. 사람들의 손에 끌려가면서 셔누는 자신만을 기다리고 있을 민혁을 떠올렸다. 그의 외로움이 불로 변하지 않기를 기도했다.
어둡고 깊은 밤이 올 때까지 셔누는 돌아오지 않았다. 민혁은 계속 기다렸다. 셔누와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사무치는 외로움에 민혁은 어깨를 움츠렸다. 셔누와 함께였던 시간은 제 생의 긴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았지만 어쩐지 혼자였을 때는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했다. 짧은 추억을 곱씹을 수록 소중했다. 하나쯤은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민혁은 셔누의 침대에 누웠다.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출렁였다. 멈춰 있던 공간에서 셔누의 향기가 일렁였다. 오후 내내 잔뜩 받은 햇살 냄새와 호수의 물 비린내가 살짝 났다.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저를 향해 웃던 땀 많은 아이가 생각났다.
"저기다! 저기야!"
"겨울의 신이 저기 있다!"
민혁은 소란스러워진 바깥을 향해 문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날카로운 칼이나 도끼를 손에 하나씩 쥐고 있었다. 어둔 밤이었지만 그들에게서 덩굴에 긁힌 상처의 비릿한 피냄새가 풍겼다. 민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들의 표정은 분노에 가득 찼으나 억지로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있었다. 민혁이 그들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자 수많은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반발자국 물러섰다. 들고 있는 횃불에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지면서 말로만 들었던 지하 세계의 악마처럼 보였다. 날이 잔뜩 서 있는 긴장감 사이로 민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년은 어디있지?"
"소년은 지, 지금 마을 광장에 있소!"
"겨울을 돌려 놓지 않는다면 녀석을 제물로 삼을 예정이오!"
주변의 공기가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잔잔하게 달빛을 받으며 고요했던 호수가 다시금 얼어붙기 시작했다. 보드라웠던 풀밭이 한순간에 단단한 눈얼음으로 변했다. 기세 좋게 쳐들어왔던 사람들의 코앞까지 하얗게 얼어붙었다.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이 땅의 얼음에 발끝이 닿자 순식간에 얼음 석상으로 굳어버렸다. 제일 앞장서 있던 군인들이 얼음 석상이 되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재빠르게 도망가기 시작했다. 민혁은 셔누를 제물로 삼겠다는 말에 폭주하여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사람들보다 땅의 얼음이 다가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몇 발자국 가지도 못한 채 사람들은 얼음으로 굳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처음 경험하는 공포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켜주어야 할 인간들을 얼음으로 만들고 부숴버리면서 민혁은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저를 먼저 협박했던 인간들이다, 셔누를 해하려 했던 인간들이다, 생각하니 민혁은 그동안 참아왔던 분노가 한 번에 터지는 듯했다. 눈보라를 일으켜 함께 했던 오두막을 날려버리고 찾아온 인간들을 부서트렸다. 눈보라는 민혁이 향하는 걸음을 향해 점점 커지며 결국 마을에는 눈폭풍이 몰아쳤다. 더는 인간들의 이기심에 견딜 수 없었다. 민혁은 마을로 내려가 셔누를 찾아야만 했다.
민혁의 발길이 닿는 곳은 모두 얼음과 눈으로 황폐화되었다. 눈폭풍의 가운데서 민혁은 다른 주변의 것들은 안중에도 들어오고 있지 않는 상태였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해하려 드는 이런 인간들이라면 다 죽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셔누를 찾기 위해 마을 광장에 도착했을 때, 민혁은 밧줄로 꽁꽁 묶여 있는 셔누를 발견했다. 얼굴과 몸은 상처투성이인 채로 아무런 반항도 없이 그저 묵묵히 무릎 꿇고 있는 소년을 봤을 때 민혁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이리도 만들 수는 없는 것이었다. 셔누의 안쓰러운 눈빛과 그만하라는 외침보다 너덜해진 옷자락과 손톱에 긁힌 자욱들이 민혁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민혁의 눈폭풍이 거세지며 마을을 덮치기 시작했다. 집과 가축과 나무와 사람들... 땅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새하얀 폭풍 안에 흩날리며 사라졌다. 마을을 집어 삼킨 후에는 눈폭풍이 하늘로 치솟으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모든 것을 그 안에서 사라지게 할 심산이었다. 셔누가 없다면 이딴 세상 따위는 쓸모도 없는 먼지에 불과했다. 공기가 얼어붙고 산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이 불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눈발이 일고 하늘에서는 주먹만 한 우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검은 하늘이 꾸물거리며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생명이라 불리는 것들은 모조리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검은 구멍에는 모든 것들의 두려움과 신음이 가득했다.
작은 마을에서는 오직 민혁과 셔누만이 땅 위에 존재했다. 마을을 백지로 만들어버린 민혁은 묶여 있는 셔누의 팔을 풀었다. 셔누의 볼에 붉게 그어진 생채기를 만지니 따가운지 눈살을 찌푸렸다. 민혁은 엄지 손가락으로 쓸린 상처의 위를 보듬었다. 내 소중한 것에 감히. 두번 다시 이 마을에, 이 곳의 땅 위에 아무것도 자라게 하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셔누는 그런 민혁의 손길을 가만히 받으며 민혁을 달래려 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거였다. 겨울의 신이. 인간들에게. 단지 저 때문이라면. 끌려가는 도중 들었던 사람들의 말대로 겨울의 신이 한낱 감정에 치우쳐 이런 일을 하는 거라면.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려 할 때, 민혁의 등 뒤로 낯선 여인이 보였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곱슬머리를 한 여인을 본 순간 셔누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을 미워하지 마세요. 겨울을 아껴주세요. 그리고, 외로워 하지 마세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민혁의 손 안에서 셔누는 어떤 말도 내뱉지 못한 채 호흡이 끊기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제 품 안으로 호흡을 하지 못하며 쓰러진 셔누를 끌어안고 민혁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벅저벅. 쌓인 눈 밭에는 아무도 없을 텐데 일정한 간격으로 걷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민혁은 난생 처음 서늘함을 느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시린 감각.
소년은 내가 데려가겠다.
두 번 다시 저 소년을 찾지 못하도록 환생조차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네 계절의 책임과 생명과 모든 것들을 저버린 대가.
영겁의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고 뉘우치기를.
하늘의 어머니가 검지 손가락을 튕기자 민혁의 품에 있던 셔누의 몸이 축 늘어진 채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지막 손 끝이라도 닿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점점 투명해지는 몸은 만질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어머니가 손짓한다면. 소멸할 것이었다. 민혁은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민혁을 찾아왔던 세 인간들이 그랬듯이 어머니의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끝없는 기간 동안 인간들을 위해 살 테니 제발 하나만 허락해달라고. 조금이라도, 잠깐이라도 좋으니 볼 수만 있게 해달라고 초라하게 엎드려 울었다.
겨울이 외롭고 슬펐다. 그 아이로 인해 겨울이 따뜻할 수 있음을 배웠다. 겨울이 즐거울 수 있구나. 겨울에도 새로운 생명이 탄생할 준비를 하는구나. 내가, 죽음만을 전하는 것은 아니구나. 그 기쁨을 처음 느껴보았다고. 민혁은 어머니의 발을 붙들며 눈물을 흘렸다. 하늘의 어머니는 결국 그 눈물을 이기지 못하고 작은 약속을 했다. 평생을 인간을 위해야 할 것이라고. 아이는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든 매번 기억을 잃을 것이라고. 다만, 너의 그동안의 노력을 위해 너의 계절만큼만은 너와 다시 만나게 하겠다고. 민혁은 그것 만으로도 관대한 처사임을 알았다.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감사하다며 울었다. 찢어지는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셔누는 어떻게든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민혁에게 말을 건네려 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죽음의 앞에서 민혁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다. 태생이 외로움이었던 민혁에게 말해주었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옆에 있어주겠다고.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서든. 그러나 하늘의 신의 손짓에 미약한 소년은 너무도 무력했다. 곧이어 민혁에 대한 기억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떠 있던 몸은 땅으로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라지지 마. 아직. 선명했던 기억이 흐릿해 져가는 것을 억지로 붙들면서 스스로에게 외쳤다. 저를 내려다보는 은색의 눈동자, 바람에 흩날리는 백색의 머리칼. 옆에서 같이 있어 주어야만 하는데. 내가, 당신을, 잊으면.
* * *
그렇게 소년은 기억을 잃은 채 다시 태어날 수 있었어.
겨울의 신은 세 계절 동안 늘 아이의 곁에 머물었지만 아이는 알 수 없었기에,
서로가 함께 있을 수 있는 겨울이 오기만을 기다렸지.
아이가 숨이 다 한 뒤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도 겨울의 신은 찾아낼 수 있었어.
여름의 신이 준 작은 선물 덕분이었지.
어느새 현우는 길고 긴 이야기에 지쳐 민혁에게 고개를 기댄 채 잠이 들어있었다.
민혁은 현우가 편히 잘 수 있도록 다시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옷과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현우가 으응,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쉬쉬. 민혁이 현우의 목까지 이불을 끌어올리며 다독였다. 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거칠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창문이 거센 바람에 못 이겨 덜컹거리는 소리를 냈다. 찬 공기가 창틀 사이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여름의 아이는 차디 찬 공기에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 걸 알았지만, 민혁은 현우가 추울 새라 노심초사하며 방의 온도를 높였다.
겨울의 신은 이제 더 이상 사사롭게 겨울을 다스릴 수 없었다. 그것은 어머니와 약속한 단 한가지였다. 겨울을 평생 다스리는 대신 인간사에 두번 다시 개입하지 않을 것. 이것만 지킨다면 현우를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는 약속. 단, 겨울을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너를 기억하지도, 너를 알아보지도 못할 거란 조건을 붙였다. 인간을 향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어머니의 처분은 관대했다. 외로워하지 말라 위로해도 제가 부여한 계절은 감내해야 할 슬픔이 깊었다. 평생을 외롭게 보냈던, 그리고 보낼 민혁에게 어머니가 겨울에게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위안이었다. 민혁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며 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현우를 볼 수 있다면. 현우를 만질 수 있다면. 민혁은 어머니의 발치에 엎드려 그 뜻에 따르겠 노라 답했다.
현우야,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제 곧 봄이 올 거야. 너는 또다시 나를 잊고 나는 계속 겨울을 기다리겠지만. 그래도 현우야, 겨울이 존재하는 동안 우리는 만나고 함께 있을 거야. 그러니까 겨울에 맹세컨대,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얘기야.
민혁은 잠든 현우의 손을 잡고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네 번째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