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last and always


유니버스 블라스트

익명D

 

 

 

 

 

 

이민혁의 지구 착륙 계획에 어두운 배경은 없다. 지구 침공이라는 거창한 행성 기밀 임무를 받았다거나 지구인에 대한 개인적 원한으로부터 시작된 게 아니란 거다. 회색빛 지구에 굳이 발 디디는 이유는 딱 하나. 지구인 손현우와의 결혼.

 

 

 

우주에는 수만 개의 도시 행성들이 있다. 이민혁이 사는 도시 행성 웨베는 그중 가장 뛰어난 평균 외모를 자랑하는 게 특징이다. 그 덕에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특이한 관습이 있는데 스무 살을 맞은 모든 웨베인들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누군가를 평생의 반려자로 삼아야 한다. 반려자와는 태어나자마자 알고 지내기도 하고 결혼할 때가 돼서 처음 만나기도 한다. 민혁은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봤는데, 전자는 친구들의 경우였고 후자는 제 경우였다.

 

이민혁은 사교적인 편이라서 주변에 사람이 많았지만 오래 연락하고 지낸 진짜 친구는 두 명밖에 없었는데 그 둘이 반려자 사이였다는 걸 알았을 때 엄청 배신감 느꼈다. 처음엔 수줍게 얘기하더니 민혁이 알고 나니까 대놓고 스무 살 되기만 기다리는 게 왠지 괘씸했던 거다. 셋이 하우스 파티를 하던 날 건배사 해보라길래 배신은 죽음! 사랑보단 우정!’ 했다가 미쳤냐는 소리 듣고 며칠간 걔네랑 안 만났다. 생각해보니까 걔네 둘 생일이 같은데 왜 거기까지 생각 못 했지. 걔네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초고속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주 둘이 좋아 죽는 거 보니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았다. 죽을 때까지 깨 쏟으면서 살라고 작정하고 오글거리는 노래 선곡해서 축가 불러줬는데 친구 하나가 감동 받아 우는 바람에 이민혁도 거기에 울컥해서 마지막 소절은 제대로 부르지도 못 했다.

 

스무 살이 되고도 영 소식이 없는 제 반려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이민혁은 다음날 날벼락을 맞게 되는데 아침 일찍부터 집에 찾아온 공무원이 말하길 행성 내에 민혁의 반려자가 없다는 얘기였다. 도시 행성이 그냥 붙은 명칭이 아니라 정말로 여간 도시처럼 이 행성이 좁았기 때문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는 얘긴 들었는데 그게 내 일이 될 줄 몰랐던 이민혁은 얇게 입은 것도 잊고 이 겨울에 대문 활짝 열어놓고 제자리에 굳었다. 그리하여 정부의 도움을 받아 다른 행성까지 손을 뻗어 이민혁 반려자 찾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공무 외 출입 금지 구역에 떡하니 놓인 반려자 레이더는 삐 삐 하는 소리를 내며 열심히 돌아가더니 곧 웨베에서 가장 가까운 행성을 가리켰고 한날한시 우주를 건너 태어난 이민혁 평생의 반려자, 손현우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14개월 하고도 보름 정도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지구로부터 온 신호였다.

 

굳이 지구까지 가서 제 반려자를 만나야 하는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던 이민혁은 우주 횡단 열차 예매 서류를 쓰면서 계속 불만이었다. 아 거기는 사람들 성격도 이상하다매. 나 무섭단 말이야. 그냥 나 여기서 혼자 살면 안 돼? 어떻게 생긴 지도 모르는 사람 뭐 믿고 좋다고 찾으러 가! 이름 나이 직업 정보 달랑 이거 들고 이 사람 생김새도 모른 채 혼자 지구에 덜렁 떨어지려니 걱정되는 건 당연했다. 아들 왁왁 소리쳐대는 거 익숙한 엄마가 그럼 세금 폭탄 니가 다 처리하든가. 한마디 했더니 볼에 바람 가득 넣고 흥... 금방 조용해졌다. 이상한 놈 나오기만 해봐 저 기계 내가 부순다.

 

 

 

아니. 이민혁은 당장 그 기계에 뽀뽀하러 가고 싶어졌다. 그것보다 지금 저기 보이는 저 남자에게 뽀뽀를 하는 게 더 빠르고 이득이겠다. 지구인 손현우에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웨베에서 미리 조작해둔 허상의 지구 신분 대학생을 연기하며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였다. 멀리서 곰 같은 남자 하나가 걸어오는데 웨베인의 귀신같은 촉으로 저 남자는 이민혁의 반려자가 확실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며 얼굴을 확인하려 했던 이민혁은 천천히 걸어나가다 기어코 옷깃을 스쳤을 때 운명을 실감했다. 전생에 행성 하나 거뜬히 구한 게 분명했다. 손현우는 외모 면에서 이민혁의 취향을 완벽하게 빼다박았더랬다.

 

 

 

웨베식 이름은 피터. 예상치 못하게 지구에 오래 머무는 바람에 오히려 지구식 이름인 이민혁이 더 편해질 지경이었다. 이곳이 웨베였으면 자연스러운 접근이고 뭐고 저 남자 내 남자다 하고 바로 침 바를 수 있었는데 저는 유도리 있는 교양 웨베인이므로 이곳은 지구라는 걸 명심했다. 이민혁은 지금 차근차근 순서를 밟아가는 중이었다. 그게 2년째라는 게 조금 문제였다.

 

 

 

 

 

혀누야

 

끝나고 뭐 먹지? 고급돈가스 먹을래? 아님 피자에 콜라?

 

 

애초에 팀플 드랍한 이민혁은 강의 끝나자마자 점심 메뉴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기는 음식에 관심도 없으면서 손현우가 좋아하니까 자연스럽게 먹는 얘기로 운을 뗀다. 이민혁의 사고방식은 손현우에 의해 손현우를 위해 돌아갔다. 모든 일에 별 내색 않는 손현우는 역시 티내지 않고 이민혁의 그런 점을 좋아했다. 애석하게도 손현우는 팀플을 버리고 자시고 할 처지가 안 돼서 이민혁 말에 대충 어어 나중에. 대답해주고 팀원들 주려 들고 온 유인물을 정리했다.

 

 

. 현우답지 않아.

 

나 지금 바로 가봐야 돼서. 이따 연락할게.

 

웅 알겠어 먹고 싶은 거 생기면 얘기해야 대!

 

 

강의실 앞에서 서로 손 흔들어주고 손현우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민혁은 어째선지 성적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저번에도 교양 팀플 그냥 버리길래 조원들이 뭐라 안 했냐고 물었더니 이름 빼도 된다고 사과하면서 적당한 요깃거리를 사줬다고 했다. 잘생긴 얼굴을 하고 그렇게 행동하니 이민혁에게 호감이 없을 수 없었던 그 팀플 조원들은 후에 이민혁 이름을 그냥 넣었다. 분명 이번 팀플도 그렇게 흘러갈 거라고 손현우는 생각했다.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놀던 손현우는 친구들이 다 서울로 가는 바람에 성적 애매한 집 근처 대학교에 혼자 남았다. 게다가 이혼하고 홀로 현우 키워주던 아빠도 너 이제 독립하라더니 자기가 집에서 나갔다. 순식간에 완벽한 혼자가 된 손현우는 조금 외로웠다. 그래도 대학교 가면 다 개인플레이라 하니 괜찮았다. 학교 갔다 집에 오면 아빠가 자기 먹으려고 해둔 밥 갖다가 배 채우면 됐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는 점 빼고 다 괜찮았다.

 

 

 

 

 

이민혁과 사귄 지는 1년 정도 됐다. 처음 만난 건 학생 식당에서. 이민혁이 정문에서 손현우를 스쳐 지났던 일은 이민혁만의 추억으로 남았다집에서 해먹긴 귀찮기도 하고 매일 다른 메뉴 주니까 나쁠 거 없어서 손현우는 다음 수업이 없어도 꼭 학식을 먹고 집에 갔다. 입에 들어가기만 하면 상관없었으므로 딱히 학식에 불평할 일도 없었다. 대학교라는 새로운 공간에 무던하게 적응해가며 주로 학생 식당에 출현했던 손현우는 언제부턴가 제 주변을 맴도는 잘생긴 애를 발견하게 된다.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멀찌감치 앉아서 식판을 둬놓고 밥은 먹지도 않고 휴대폰이나 보는데 휴대폰 너머로 불쑥불쑥 마주치는 시선이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하루이틀 반복되더니 결국 그 잘생긴 애는 텅 빈 자리 다 놔두고 손현우 앞자리에 앉았다. 손현우는 그때 당황스럽다기보다는 왜 이제야 왔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손현우는 떡볶이 어묵을 우물우물 씹으면서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저 알죠.

 

... .

 

제 이름은 피터...가 아니라 이민혁이에요. 혹시 이름 알려줄 수 있어요?

 

 

안 알려주겠다면 어쩔 셈이쥐. 혼자 그런 대답을 상상해놓고 자기가 웃겨서 푸학 하고 웃은 손현우는 눈가에 주름을 자글자글 만들어 놓고 손현우예요. 하며 정상적인 대답을 내놨다. 그때 이민혁은 처음으로 남의 주름을 귀여워하며 눈에 주름 뭔데!!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통성명을 하고 말을 트면서 이민혁과 손현우의 대화는 누가 미리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물 흐르듯 흘러갔다. 모든 게 이민혁의 계획아래 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상하리만치 시간표가 똑같은 이민혁을 보고도 의심은커녕 우와... 하고 감탄하는 손현우도 알게 모르게 계획을 돕고 있었고. 은하가 점지해준 인연값 하는지 애정을 쌓고 서로가 같은 마음인 걸 확인하는 데엔 그로부터 얼마 걸리지 않았다.

 

 

 

 

 

손현우 보내주고 혼자 남은 이민혁은 학과건물 일 층 소파에 덜렁 앉았다. 이민혁은 손현우가 하면 같이 해서 별 필요도 없는 수업도 다 듣고 중간고사 기말고사 전부 치는데 팀플은 안 했다. 굳이 지구인이랑 쓸데없는 인연을 만들면 일이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같은 조에 현우가 있으면 모르겠는데 아직 그런 적은 없었다. 혀누... 발음 뭉개면서 귀여운 이름 두 글자 입에 오물거렸더니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현우는 어떻게 이름도 현우야? 으으 귀여워서 짜증나. 혼자 주먹 쥐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이상행동 보였지만 이민혁 손현우한테 껌뻑 죽는 또라이인 거 같은 건물 쓰는 다른 과까지 알려진 공공연한 사실이라 저거 또 손현우 생각하는 거겠거니 전부 그냥 지나쳤다.

 

 

와중에 그냥 지나치지 않는 지구인 하나 있었으니 이민혁이 지구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표정 갈무리할 생각 요만큼도 없어서 이민혁은 방금까지 솟아있던 입꼬리 내리고 혀 한번 찼다. ... 온다.

 

 

손현우 어디 감?

 

현우 팀플.

 

새끼 표정 봐. 아아 사줄 테니까 가자.

 

 

내키지 않았지만 안 따라가면 시끄러워져서 건물의 평화를 위해 따라가줬다. 니 얘기 관심 없다고 휴대폰 보면서 걷는데 이 지구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 고작 아아 사주는 데 따라가는 모양새가 된 게 자존심 상했다. 쌓이는 피로에 심신의 안정이 필요해서 어제 찍은 현우 사진 넘겨보는데 그거 옆에서 보더니 기어코 그 말을 꺼내는 거다. 넌 손현우 왜 만나냐?

 

 

지난번엔 이 지구인 때문에 현우와 헤어질 뻔했다. 현우 면전에 대고 이 소리 똑같이 한 적 있었는데 그때 반 죽여놓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한다. 아아 이제 진정으로 죽일 때가 온 건가. 진심이었지만 이민혁은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서 화를 삭였다. 그런 일에 힘 쓰긴 싫었다. 있는 힘 모두 현우 사랑하는 데 써도 부족했다.

 

 

너 소개 좀 시켜 달라는 동기들이 줄을 섰다니까.

 

설마 손현우한테 뭐 약점 잡혔어? 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도움,

 

 

배려해서 혼자 화 다스렸더니 고마운 줄 모르고 깝치는 게 대견했던 나머지 어디 조용한 데 들어가 정강이 안마해줬다. 아 아파! 미쳤냐?! 주객전도라더니 지금 눈 치켜뜰 사람은 이민혁인데 그걸 뺏어서 하는 모양이 보기 좋았다. 손현우랑 관련된 일이면 이민혁 예민해지는 거 다 아는데 주제넘은 오지랖 또 부려보고 싶었던 거다. 결과적으로 이민혁의 화를 돋우는 데 완벽히 성공했다. 아무 말 안 하고 한쪽 눈 쌍커풀 더 진해져선 정강이 부여잡고 쪼그려 있는 지구인 안광 다 죽은 눈으로 내려다보니 그 순간 걔는 처음으로 손현우를 걱정했다. 손현우가 오히려 약점 잡힌 거 아냐? 이 미친놈!

 

 

말 함부로 해.

 

 

여전히 눈은 걔를 응시하면서 턱짓으로 골목 밖을 가리켰다. 당장 꺼지라는 뜻이었다. 이건 이해하기 쉬웠는지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 아 시간 낭비했네... 양쪽 손 세 손가락 가지런히 모으고 조금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하면서 다시 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혀누 팀플 왜케 오래 해! 나 빼고 맛있는 거 먹는 거 아니겠지? 아까 도망가던 지구인마냥 허둥지둥 휴대폰 확인했더니 마침 손현우한테서 문자 하나 왔다. 나 지금 끝났어 민혁아. 어디야?

 

 

 

 

 

다른 행성에도 생명체가 있대.

 

혹시 웨베라는 행성 들어봤어? 거기가 지구인들한테 발견된 지 얼마나 됐냐면...

 

은하철도 구구구 있잖아. 그거 진짜 있다? 그거 어떻게 생겼냐면...

 

 

손현우는 주먹을 바득바득 문질렀다. 칼국수 앞에 두고 체할 것 같았다. 이민혁은 다 좋은데 이런 주제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편이었다. 그게 싫은 건 아니고 이 주제에 관심이 없어서 적당한 반응 못 해주는 게 조금 미안했다. 근데 가만히 듣는 손현우 귀에다 대고 온종일 중얼거리는 게 이민혁 일상이고 당연한 일이라서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 없었다. 뜬구름 잡는 얘기도 아니고 언젠가 이 지구를 떠날 현우가 들어 놓으면 좋으니까. 받는 사람은 받을 생각도 없는 배려였다.

 

 

근데 혀누야. 넌 너보고 다른 행성 가서 살라고 하면 어떨 것 같아?

 

... 생각 안 해봤는데.

 

지금 생각해봐! 어때? 막 무서워?

 

 

말도 안 되는 일 상상하는 거에 분명 취미 없는 손현우는 이민혁이 상상해보라고 하면 또 진지하게 상상했다. ... 손현우가 허공 쳐다보면서 데굴데굴 머리 굴리는 소리를 내는 것 같을 때 이민혁은 너무 행복했다. 손현우가 귀여워서 행복했다. 나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 진짜? 진짜?! 이번엔 손현우가 이민혁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줘서 행복했다. 손현우를 빼면 별 볼 일 없는 지긋지긋한 이 지구를 벗어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팀플이 생각하는 대로 안 흘러가서 손현우는 덤덤한 얼굴 뒤로 꽤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였다. 그냥 나도 민혁이처럼 포기할까. 아니 민혁이 저러는 거 내가 다 먹여 살려야 되는데 그럴 순 없지. 노트북에 다시 집중하려다 카페 같이 와선 현우 옆모습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민혁과 눈이 마주쳤다.

 

 

? 할 말 있어?

 

 

뭐가 좋은지 실실 웃는데 뒤에 보이는 게 설마 강아지 꼬리? ...잘못 봤네. 근데 방금 그거 셰퍼트 꼬리는 아닌 것 같아. 이민혁 닮아가서 자기도 모르게 특이한 상상 하던 손현우는 탁 트인 앞 유리로 시선을 옮기면서 손깍지로 머리를 받치곤 흘러가듯 얘기했다. 니 말대로 다른 행성 가서 살까 봐.

 

 

어우 괜찮아?

 

현우야... 방금 뭐라고?

 

 

이민혁은 맨날 손현우한테 행성이고 우주고 얘기하면서 손현우가 한마디 하니까 커피를 줄줄 흘리면서 놀란다. 손현우는 급하게 휴지를 들고 와서 이민혁 목이고 바지고 전부 닦아주며 아니 니가 하도 우주 그런 거 얘기하니까... 민망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랬다. 그러자 이민혁이 손현우의 두 어깨를 가볍게 그러쥐고는 들뜬 목소리로 진짜 가고 싶어? 다시 못 돌아와도? 물었다. 당황한 손현우가 삐걱대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민혁은 먼저 집에 가보겠다며 사라졌다. 이렇다 할 친구가 있는 것도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짜 우주에 가도 상관없었다. 근데 진짜 가고 싶으면... 그게 가지나? 아 나 진짜 민혁이 닮아가나 봐.

 

 

 

 

 

이민혁이 커피를 잔뜩 묻히고 갑자기 사라진 뒤로 손현우는 근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이민혁 머리카락 하나 본 적 없었다. 연락도 안 된다. 답장을 받지 못한 카톡이 줄을 지었고 손현우의 최근 통화기록은 온통 이민혁에게 남긴 부재중 전화였다. 걱정돼서 집에 찾아가려고 했으나 팀플이 산으로 가는 걸 막느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팀플을 간신히 해결한 손현우에게 쉴 틈도 없이 바로 다음 할 일이 생겼다. 민혁이 집에 가봐야겠다. 손현우는 이민혁이 걱정됐고 이민혁이 보고 싶었다. ...나 보고 싶지도 않은가. 이민혁의 자취방은 학교에서부터 조금 걸어야 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로... 손현우는 가던 길을 멈추고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섰다. 연락 안 받는 걸로도 부족해서 번호를 아예 바꿔버린 거다. 손현우 없이 못 사는 그 이민혁이. 안 받는다는 소리를 잘못 들었나? 손가락 삐끗해서 잘못 눌러도 이민혁한테 연락 갈 전화 목록에서 다시 이민혁의 이름을 누르고 음성이 나오길 기다렸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내가 지금 눈치 없이 구는 건가? 손현우는 입술을 툭 내밀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지 한참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게 그 잠수이별 아닌가. 지식인이나 에타에 애인이 연락을 안 하더니 번호를 바꿨어요. 하고 글을 올리면 백이면 백 그런 답변일 거다.

 

 

손현우는 이민혁을 마지막으로 본 날을 다시 떠올렸다. 다른 행성 가서 살겠다고 했고 다시 못 돌아와도 가겠냐는 이민혁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렇게 해도 손현우는 괜찮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별로 진지한 말과 행동은 아니었다. 이민혁이 그런 얘기 좋아하니까... 그럼 손현우도 좋았으니까. 그래서 그런 건데. 이게 이렇게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 몰랐다. 이민혁 집에 찾아가는 걸 포기했다.

 

 

 

 

 

손현우도 아는 얼굴이었다. 몇 번 본 적 없지만 그 인상이 기분 나쁘게 강렬해서 보자마자 기억났다. 이민혁과 영화 보러 가던 길 마주쳤던 이 녀석은 손현우가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이민혁에게 손현우를 왜 만나냐고 물었다. 그 말은 확실히 기분 나빴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맞는 말인 것도 같아서 이민혁에게 잠깐 시간을 갖자고 했었다.

 

 

 

 

 

이민혁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미 손현우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같은 과에 시간표까지 같은데도 불참 인원 없었던 새터 때 본 적 없는 얼굴인 게 수상한 줄도 몰랐다. 그 얼굴이 거기 있었으면 조용히 넘어갔을 리도 없고. 지금까지 이민혁이 손현우에게 보여준 애정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시간을 갖자고 했는데 사실 시간을 가지지도 않았다. 이민혁은 툭 치면 울 것 같은 눈으로 손현우 곁을 매일 조용히 지켰다. 먼저 시간 갖자고 해놓고 아무렇지 않게 대하면 이상할 거 같아서 손현우는 애써 이민혁 시선 피하고 말도 안 걸었는데 어차피 시간표가 같았던 거다. 다른 건물 다음 강의까지 남은 십 분 사이에 둘은 계속 같이 걸었고 강의실 와서 항상 앉던 앞자리 앉지 않고 다른 데 앉아도 이민혁이 꼭 옆자리에 앉았다.

 

 

말 한마디 안 하고 보내던 시간이 며칠쯤 지났을 때 한 시간 있는 공강에 도서관 가는 길 옆에서 묵묵히 따라오던 이민혁이 손현우 따라오지 않고 저만치에 멈춰 섰다. 당연하게 뒤 돈 손현우가 고개 푹 숙인 이민혁을 보고 다가가서 민혁아. 며칠만에 불러보는 이름에 조금 머쓱해져 뒷머리를 긁었더니 이민혁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게 이민혁의 순정이었던 것 같다.

 

 

현우야...

 

.

 

나 버리지 마.

 

...버리다니.

 

니가 이대로 나한테 목소리 안 들려줄까 봐 무서웠어.

 

 

 

 

 

요즘 이민혁 왜 학교 안 나와?

 

나도 몰라.

 

아니 현우야. 나 마지막으로 걔 봤을 때 너무 무서웠잖아. 이중인격이야 뭐야.

 

?

 

 

그날 일을 용서해서 대화 받아준 건 아니었고 그냥 얘기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항상 이민혁과 함께였던 학생 식당에서 언제부턴가 혼자가 된 손현우 앞에 오늘 이 녀석이 앉았다. 적당히 대꾸해주며 메뉴로 나온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물었다. 정말 적당한 대꾸만 해주고 사실 걔 말은 하나도 안 듣고 있었다. 무서워? 이중? 대충 그런 단어를 들었는데 관심 없었다. 걔가 하는 말에 신뢰라곤 없어서 손현우는 미간을 찌푸리고 샌드위치나 우물우물 씹었다. 샌드위치 맛은 만족스러웠다. 채소가 신선하네. 양상추 씹으며 들리는 아삭아삭 소리에 손현우는 민혁 없는 울울한 하루 속 조그맣게 살아있는 행복을 반가워했다.

 

 

다시 샌드위치 한입 베어물려고 하는데 걔가 현우의 샌드위치를 가리키면서 오이 떨어지겠다고 얘기했다. 미안하지만 그때 처음으로 걔 얘기를 들었다. 어어. 뒤늦게 빵을 세게 쥐었지만 결국 툭 하고 떨어진 오이를 내려다보고 있으니까 순간 오이 못 먹는 누가 생각나는 거다. 손현우는 이 상황에도 아직 누구를 많이 좋아해서 그 누구만 생각하면 웃음이 자동으로 나는 거라. 흐흥. 눈가에 주름지어 웃자마자 앞에 앉아있던 애가 반사작용으로 갑자기 의자에서 나가떨어졌다. ... 뭐쥐. 눈 동그랗게 뜨고 느리게 고개 들었더니 오이 못 먹는 누구랑 눈이 마주친 거다.

 

 

...

 

현우야 괜찮아?! 이 새끼가 뭐라고 했어? 너 다치게 했어?!

 

 

다치게 한 건 지금 너인 거 같은데...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손현우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고개만 저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떨어지는 건 손현우도 막을 수 없었다. 들고 있던 샌드위치를 식판 가운데 내려두고 옷 소매를 잡아당겨 벅벅 눈 비볐다.

 

 

현우야...

 

...

 

현우야 그렇게 세게 문지르지 마 너 아파...

 

 

못 본 지 이 주는 족히 됐는데 이민혁 눈빛은 이 주 전이랑 똑같아서 어이가 없었다. 너 없이 살던 이 주는 나만 지나온 건지 아무렇지도 않게 손현우 걱정부터 하는 게 좋다가도 미웠다. 여태까지 뭐 하다가 이제 나타났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입술이 떼지지 않았다. 모든 이의 시선이 이곳으로 향하고 있어서 손현우는 먼저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나가자. 손현우가 먼저 등을 돌리자 이민혁이 응!! 하고 따라 나갔다. 쓰러진 걔 돌아보지도 않고 손현우 쫓아가는데 뒤에서 이민혁! 하고 부르는 거다. 오늘이야말로 저 지구인을 죽이려다가 현우가 바로 앞에 있으니까 용케 바락바락 남의 이름 부를 정도로 살려 둔 이민혁 착한 건 알아줘야 했다.

 

 

너 지금 사람 쳤어 이민혁!

 

그게 누구야? 난 피터인데.

 

 

 

 

 

이미 잔반 처리하고 저만치 걸어간 손현우 붙잡은 뒤에 헉헉거리면서 우리 현우 누가 울렸어! 진짜 괜찮은 거야? 이민혁이 또 먼저 묻는 건 손현우 안위였다. ? 현우야. 대답 없는 손현우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민혁의 속내를 알기 힘들었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구는 건 뭐냐고. 지금은 나만 그런 마음인 거 아니냐고. 손현우 인생 최고로 마음이 울렁여서 지금 좀 힘들었다. 아까 나오면서 집어넣었던 눈물이 다시 흘러나오는 걸 입술에 힘주고 참았다. 그거 보던 이민혁이 걱정하던 눈빛 집어넣고 실실 웃으면서 손현우 입술을 검지로 툭 눌렀다. 현우 귀여워. 나 많이 기다렸어? 미안해 현우야.

 

 

... 너 어디 있었어.

 

나 계속 집에 있었는데 일이 많아서 연락 못 했어 미안해.

 

번호는 왜 바꾼 건데?

 

번호?... 아 그거 바꾼 거 아니고 없앤 거야! 이제 필요 없으니까.

 

 

왜 필요 없지? 손현우는 이민혁이 좀 알아들을 수 있게 얘기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학생 식당을 나와서 복도에 덩그러니 서 있던 둘은 민혁의 주도로 학교 앞 프랜차이즈 카페 햇빛 잘 드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민혁은 계속 싱글벙글했고 이유 모르는 손현우만 기운 빠졌다. 그래도 이민혁이 저렇게 기분 좋아 보이니까 아직 손현우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좋은 일이 있을 거란 걸 알았다. 자 이거 현우 너 커피. ...

 

 

내가 너무 급해서 너 배려도 못 하고 나 진짜 못 됐다.

 

아니 뭐...

 

있지 나 현우 너랑 이 지구 떠나서 잘 살고 싶어.

 

?

 

혹시 내가 웨베라는 행성 얘기했던 거 기억나? 사실 거기서 왔어 나는.

 

..?

 

 

그러니까 니가... 외계인이라는 거야? 이민혁이 외계인이래. 손현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근데 웃긴 게 생각보다 놀랍지 않았다. 이민혁이 하도 옆에서 외계인이고 뭐고 그런 얘기를 자주 해서 그런지 거짓말처럼 쉽게 수긍하는 손현우가 있었다. 어쩐지 이민혁이 미래가 없는 것처럼 살던 것도 이제야 앞뒤가 맞았다. 이민혁은 진짜 미래가 없었던 거다. 이 지구에서의.

 

 

현우 니가 지구 떠나도 괜찮다고 했던 날 있잖아? 그날 내 생애 최고로 기분 좋은 날이었어. 그때 커피 쏟은 옷 입고 집 가서 우주 열차 예매하고 우리 집에 연락하는 데 커피 냄새 엄청 향긋하더라. 여기 오는 건 금방이었는데 다시 돌아가는 건 생각보다 좀 복잡하더라고. 나 멀티 잘 안 되는 거 알지. 니가 무엇보다 제일 중요하니까 널 제일 신경 썼어야 했는데 회귀는 처음이라 그렇게 못 했어. 이건 백번 천번 내가 잘못했어 현우야.

 

 

 

 

 

나 지금 현우 니 마음 이해해.

 

...

 

조금 더 복잡하게 해도 돼? 근데 사실 내 생각엔 더 간단해질 것 같아.

 

...뭔데?

 

나랑 결혼하자 현우야.

 

 

결혼하자. 그 말을 들으니까 이민혁 말대로 이 모든 게 간단히 한 줄로 정리됐다. 이민혁은 외계인이니 다른 행성 가서 결혼하자고. 며칠을 얼굴 보여주지도 않더니 평생 얼굴 보자고 얘기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잠시만.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자꾸 손현우 안에서는 말이 되니까 이민혁한테 시덥잖은 우주 얘기 듣던 게 이런 데서 도움 되네 싶었다. 근데 지금은 그때랑 다른 게 이 얘기에는 반응을 어떻게 해야 할지 손현우는 정확히 알 것 같았다.

 

 

민혁아 나 지금 이해되는 거 하나도 없거든.

 

근데 딱 하나 알겠어.

 

 

 

 

난 너랑 있을 수 있으면 어디든 괜찮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