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st, last and always


Bell

떼굴

 

 

 

민혁은 허벅다리를 두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내리길 반복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괜히 핸드폰을 꺼내 어차피 옷을 갈아입느라 보지도 못할 현우에게 토독토독 메시지를 찍었다. 돈 앞에 편견 없다더니 그 말이 맞나봐. 다음주엔 반지 사러 을지로도 가야겠어.

 

긴장되는 건가?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잘 다림질된 턱시도 하의의 천이 생각보단 그리 좋진 않았다. 까끌하네. 현우 보다 조금 빠른 탓에 준비를 조금 먼저 마친 것뿐인데 저 커튼 뒤에서 나올 순백의 신부를 기다리는 '예랑이'가 된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신랑이 맞긴 한데.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일부러 입꼬리를 내려 눌렀다.

 

 

그러니까 지금 민혁이 이러고 있는 이유는...

 

 

 

 

 

 

 

 

 

 

Belle - 떼굴

 

 

 

 

"민혁아"

 

"-,"

 

"너는 내가 왜 좋아?"

 

 

, 일정하게 이어지던 칼질 소리가 멎는다. 밥솥이 치익-, 김을 뿜어낸다.

 

 

"...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 종이 울린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느즈막이 일어나 아침도 점심도 아닌 끼니를 대충 때우고, 좀 늘어져 있다 보면 때를 맞춰 현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이야?"

 

", 오게?"

 

", 이제 수업 다 끝났어."

 

"알았어. 밥은?"

 

"너는?"

 

"아직 안 먹었어. 해둘까?"

 

"응ㅎㅎ"

 

 

으레 하는 대화, 늘 같았던 분위기. 모든 게 다를 게 없고 오늘도 똑같이 흘러갈, 분명 그럴 터였는데.

 

 

"너는 내 어디가 좋냐구"

 

"아니, 그러니까.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 그냥, 말 그대로지 뭐."

 

 

  다른 의도는 없어-, 훤히 들여다 보라는 듯 투명한 것인지 아님 너무 새까만 나머지 저를 맞 비추고 있는 건지 모를 눈이 민혁을 똑바로 마주 본다.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형이 몇 시 출근이었지? 오늘 뭐 누구 스캔들이라도 났나? 형이 일하는 수영장에 이런 이야길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지. 민혁은 복잡하게 흘러가는 사고로 현우의 일과를 죄다 뒤져본다.

 

너야? 네가 이런 소릴 한거야? 아뇨, 아니에요. 전 무죄에요. 죄 없는 사람들이 민혁의 드잡이질에 혀를 내두르며 도망을 치고 그러는 사이,

 

 

"민혁아, 저거 넘친다."

 

"? , "

 

 

 

레인지 위에 올려둔 냄비는 민혁의 속처럼 부글부글 끓다 못해 넘치는 중이었다. 다급히 불을 줄여봐도 이미 넘친 국은 다시 돌아갈 맘이 없다. 식식거리는 소리와 함께 애써 열을 내려누르는 탄 냄비는 다시 쓰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씨, 비비기만 했으면 끝인데. 만들다 만 잡채,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고기 대신 자리를 채우려 잔뜩 썰어둔 야채와 미리 물에 담가두었다가 건질 때를 놓친 퉁퉁 불어 터진 당면 때문에 싱크대가 온통 정신이 없었다.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말 한 마디로 이렇게 난장판을 쳐놔.

 

다들 쉬는 날에 혼자 못 쉬고 일하고 오는 현우가 맘에 쓰여 솜씨 발휘한답시고 벌려둔 주방이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됐다. 현우의 말 한마디에 오락가락하는 게 제 맘과 똑같아 못내 그마저도 짜증스러웠다. 민혁은 애써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아까의 질문에 방황하던 사람이 아닌 척 거짓 웃음을 걸쳤다. 국이 넘쳐서 못 먹겠다느니, 괜히 이건 잘라놔 가지고 정신없다느니.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치우는데 식기들이 부딪혀 쨍쨍 소리를 낸다.

 

, 이건 다 형이 괜히 나 놀라게 이상한 소리를 해서 그래. 엄마랑 싸우고 세게 닫고 들어간 방문을 보고 내가 한 게 아니라 바람이 그랬다고 변명하는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기려고 잔뜩 벌어진 간격 사이를 포장하고 자신을 덮었다. 하지만 각고의 노력에도 현우는 아까와 다름없는 눈만 끔뻑거릴 뿐이다. 이 인간이 기껏 수습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답답한 마음에 돌아서서 물을 끝까지 틀어 놓고 까맣게 탄 냄비를 박박 닦으며 저 인간한테 놀아난 스스로를 탓하는 수밖에 없다고 여기는 민혁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랬다.

 

 

", 형 그거 그냥 둬. 내가 닦을,"

 

"아냐, 빨리 치워야 니가 대답해 줄 거 아냐."

 

"?"

 

", ~ 왜 자꾸 모르는 척이실까?"

 

 

짐짓 화난 표정을 짓는 현우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워야 하는데, 외려 지금은 오들오들 공포로 어깨가 떨렸다. 민혁은 이 상황이 아주 엿같이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이 인간 이거 그냥 넘길 생각 없구나. 아니 근데 어이가 없네?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건 왜 이미 확신하고 있는 거지?

 

오우 이거 아직 뜨겁다. 자신과 달리 별생각도 없이 레인지에서 넘친 국을 닦아내려 낑낑거리는 현우에 민혁은 얼이 빠져버렸다. 나 지금 무슨 유튜브 콘텐츠에 몰래 동원되고 그러는 건가? 갑자기 친한 형과의 이상야릇한 관계에 빠진다면? 10년 동안 짝사랑해온 절친이 하루 아침에 변한다면? 뭐 그런 거? 민혁은 싼티나는 타이틀이 붙은 유튜브 영상 같은 걸 떠올려봤다. 놀란 저의 얼굴을 중심으로 기괴한 이모티콘이 덕지덕지 붙은 썸네일 이미지. 그나마 이쪽이 좀 더 현실성 있어 보였다. 아니 그렇잖아, 갑자기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 .

 

 

 "내가 형 좋아하는 건 기정사실?"

 

", 글치"

 

"?"

 

"니가 전에 말해줬잖아. 나 좋아한다고."

 

 

 이러잖아.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 이런 거 몰라. 이젠 민혁의 얼굴색이 파리하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 니가. 뭘 지금 와서 묻냐는 듯 쑥스러운 제스처까지 취하는 손현우. 이거 뭐지? 내가 지금, 내가 이상한건가? 민혁은 혼란스럽다 못해 그냥 현우를 한 대 패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웃음이 나와 지금?

 

매일 같이 본인 운동도 모자라 남의 운동 선생까지 하는 저 돌쇠와는 달리 내가 요즘 좀 할 일이 없긴 하다마는, 대국민 몰래카메라쇼에 신청서를 쓴 적은 없는데. 남의 속은 타들어가는 줄도 모르고 현우는 얘기하면서 먹을 배달음식으로 뭐가 좋겠느냔다. 진짜 장난쳐? 뭐가 넘어가겠냐고. 민혁은 아무거나 시키라고 하고 그냥 제 방으로 들어와 누웠버렸다. 이럴 땐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냥 어디서 상한 술이라도 주워 먹었나 보지. 그렇게 내가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니까 하여간 말은 더럽게 안 들어요.

 

 

"민혁아,"

 

"아 좀! 나가아악!"

 

"왜애, 우리 얘기 다 안 끝났잖아."

 

 

히죽거리는 얼굴이 자연스럽게 민혁에게 다가온다. 이 상황에도 거리낌 없이 민혁을 끌어안으며 키득거리는 게 열이 받아 죽어버릴 것 같지만 사람은 그리 쉽지 죽지 않았다. 그런 민혁에게 살살 달래는 투로 현우가 말을 건넸다. 화났어?

 

 

"내가 왜 화나."

 

"화났는데? 얘기하기 싫어서 도망간 거잖아 지금."

 

 

확신한다는 듯 빙글거리는 웃음이 섞인 말투에 민혁은 제 얼굴을 덮고 있던 팔을 획, 하고 내리곤 날선 눈으로 현우를 노려봤다. 어우 무섭다 야. 말과는 달리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드리워진 채다. 자연스럽게 비비적거리는 것에도, 힘주어 끌어안고서 화 풀라고 하는 것에도 오늘만큼은 넘어가주지 않을 거다. 난 진짜 이럴 생각이 없었다고!

 

혹여라도 제 감정이 짐이 될까 들키지 않고자 최대한 갈무리하고 다닌 민혁으로서 오늘이 그렇게 억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현우가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지가 했대. 나 참, 이민혁 그냥 죽자. 창피해서 살 수가 없다. 이 영악한 곰새끼한테 지 혼자 반한 것도 모자라서 니가 먼저 좋아한다고 했대. 근데 그걸 기억도 못한대. 이게 말이 되냐?

 

하지만 울어봐야 소용은 없다. 영악한 곰새끼는 "영악"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은 만큼 자신이 우위를 점한 상황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걸 아는 만큼 민혁은 이 상황이 싫었다. 이럴 때의 현우가 하는 생각에 대해서는 전혀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니까. 지금 제 마음을 가지고 현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민혁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늘 그랬다. 어디 가서도 머리 나쁘단 소리는 들어 본적이 없다. 말싸움? 그런 건 애당초 다들 포기하고 걸어오지 않는 난데? 당장 제 면전에 대고 싫은 소리 못하게 하는 데에는 선수인 민혁이었어도 단 한 명, 현우의 앞에만 서면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저 씨익 웃는 얼굴로 알 수 없는 생각들을 내뱉는 현우를 볼 때면 꼭 머릴 얻어맞은 것마냥 벙벙 귓가가 울리고 머릿속은 새하얗게 들떠버린다. 고민하는 것도, 셈하는 것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진다.

 

가끔씩 말도 안 되게 당황하고 붕 떠버리는 이유가 현우를 마음에 품고, 남들과 다르게 그를 좋아해서라는 건 그를 처음 만났던 시절부터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럴게 민혁의 인생에 그런 사람은 현우가 처음이었고, 그 뒤로는 본 적이 없으니까. 제 인생에서 유일한 존재. 부모님이 들으면 퍽 슬퍼할 이야기긴해도 어쩔 수 없었다.

 

욕심인지 고집인지 모를 생각으로 그래서 더욱 '특별한' 관계보다는 '평범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해왔다. 대비도 채비도 못한 사이에 10년간의 노력을 박살 낸 것도 모자라 그 무게도 모르고 즐거이 반응하는 현우를 보고 있으니 장이 죄 꼬이는 기분이었다. 가볍게 보지 말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건만 기분 나쁘게 여겨주지 않아서 기쁨의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또 뭐람? 좋아하는 상대한테는 다 이러나? 난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데 도무지 이걸 어떻게 억눌러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 상황에 퍽 난감했다. 현우는 그런 민혁의 복잡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이에 있지만, 늘 이것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지만, 더 가까워질 수는 없다고 단정 지어둔 사람. 중학생 때 처음으로 현우에 대한 감정을 깨우친 뒤로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마음이었다. 좋아할지언정 그 이상은 안된다고. 그 덕에 꼬박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현우와 무탈히 지내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 물거품이 됐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할 지도 막막했다. 그냥 눈 감고 시간만 줄줄 흘렀으면 하는 바람만 들었다. .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민혁아."

 

"왜애, 또 뭐."

 

"그렇게 싫어?

 

"뭐가"

 

"그냥, 형 좀 받아주면 안 될까?"

 

 

이럴 때만 형이래. , 또 머릿속이 새하얗게 들뜨기 시작한다. 민혁의 놀란 눈이 채 현우에게 제대로 닿기도 전에, 또 영악한 곰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짧게 포개졌다가 떨어지는 입술. 꾹 도장을 찍고선 올곧게 시선을 마주하면서 나 여기 있소, 명확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심장이 그에 응해서 격렬하게 뛰어댔다. 벌겋게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도, 형도.

 

 

[, . 분명한 종소리였다.]

 

 

사고는 다 쳐놓고 이제 와 부끄러운지 눈을 피하며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품 안에 머릴 숨기는 모양새가 어이가 없다. 반사적으로 도망치는 사람을 놓칠세라 부여잡는다. 형 이게 뭐 하는 거야? 묻는 말에 고개도 들지 않고 현우는 외려 민혁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어 제 얼굴을 가렸다. 민혁 역시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자극이 너무 셌다. 한쪽은 숨으려 들고 한쪽은 마주하려 드는 꼴이 아까와는 완전히 반대였다.

 

 

"현우야, 이게 무슨, 뭐냐니까? ? 나 좀 봐."

 

"……."

 

 

양쪽 다 필사적이지만, 이번엔 민혁이 좀 더 우세했다. 민혁은 큰 손으로 아귀힘을 발휘해 팔을 떨어뜨려내곤 잽싸게 제 얼굴을 가리는 현우의 얼굴을 부여잡았다. 형 방금 뭐야. 무슨 생각이야. 와다다 쏘아붙이는 공격에 둘 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겨우 한참만에 정신을 차리고 둘이 인지할 수 있는 상태에서 오간 말은,

 

 

 

".그렇게 오래 좋아하는데 누가 몰라."

 

"……."

 

", 오늘 다른 쌤이 결혼한다고 청첩장 주길래 받았거든"

 

"."

 

"조금 부러웠어. 누군 결혼한다는데 여긴 훤히 아는데 시작도 못하니까"

 

 

였다.

 

 

 

 

이걸 허탈하다고 표현해야 해, 아님 행복하다고 표현해야 해? 민혁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침대에 드러누워 애꿎은 천장에 눈으로 레이저빔만 쏴댔다. 제 눈치를 보며 다시 들러붙지도 않는 현우를 신경 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건 형이 먼저 나를 배신한 거야.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다고 했지"

 

"..."

 

"언제? 언제부터야 그거"

 

"너 고등학교 입학할 때니까,"

 

"!?!?"

 

"어우 깜짝아..."

 

 

침대에 누워있던 민혁이 벌떡 일어나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배신이다.

 

 

"그때부터 알았다고? 내가 말한 게 아니라? 아니, 그것보다 그걸 그냥 냅뒀어? 그때부터?"

 

"그냥, 니가 말하고 싶어지면 그때 하겠거니 싶어서 그랬지."

 

"……."

 

 

어이가 없어도 이렇게 없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무슨 말을 더 꺼내야 할까. 분명히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은데, 입 밖으로 뭐 하나 던져지지가 않았다. 혀가 말려들어간다는 게 이런 건가? 제멋대로 열이 막 뻗쳤다가 일순 가라앉길 반복했다. 그런 민혁의 옆에서 눈치를 보며 쭈뼛거리던 현우가 말을 붙였다.

 

 

", 민혁아 미안해 내가 괜히"

 

"그럼 미안해야지! 많이 미안해야지! 아예 모른 척 하려면 끝까지 작정하고 하던가! 아님 알았던 그때 이야길 하던가! 왜사람 등신 만들어? , 청첩장 받으니까 내 생각이 나? 이게 무슨 진짜……"

 

 

감정이 너무 앞선다. 조절이 안됐다. 쏘아붙이듯 현우를 책망했다. 현우는 그런 민혁의 분에도 씁쓸히 웃으며 답했다. 미안해, 내가 좀 사람 대하는 게 그렇잖아. 그러면서 또 그 투명한 건지 쌔까만건지 모를 눈동자를 민혁에게 건넨다.

 

 

"근데.."

 

"근데 뭐!!"

 

"너도 생각해 봐."

 

"."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다른 사람 만난 적 있어?"

 

"..."

 

"내가 누구 좋다고 한 적 있어?"

 

"..."

 

"내가 다른 사람이랑 너처럼 지내는 거 본 적 있어?"

 

"..."

 

"너는? 너는 나 말고 다른 사람 만난적 있어?"

 

"..."

 

 

, 알았어. 그만, 그만해 봐. 이민혁은 바보였다. 여태껏 이런 방향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10년이 넘는 동안 저도, 현우도 둘 외엔 그 어떤 관계도 맺은 적이 없다. 그건 부러 서로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민혁이 쉬지 않고 머리를 굴리는 동안 현우는 푹푹 치명상을 만든다. 현우가 덧붙이지 않은 수많은 말들이 민혁의 귀에 꽂힌다. 그래 맞아. 말만, 고백만 안 하면 다냐? 니기럴. 난 진짜 병신이야.  

 

 

"혹시라도 니가 우리 그런 거 아니라고 할까봐"

 

"……."

 

"그럼 무섭잖아."

 

"..."

 

"그래도 다행이다. 나 좋아하는 거 맞아서."

 

"..."

 

", 나 눈물 난다.”

 

 

친해지고 보니 형이라 어린 자존심에 '현우야'라고 부르던 걸 엄마에게 들켜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골목 끝에 다다라 '현우야 잘 가!'하며 손을 흔들던 날. 물이 싫어 냄새까지 비리다고 코를 찡그리는 정도면서 현우가 혼자 수영장을 쓰는 날이면 난간에 걸터 앉아 그날의 운동이 다 끝날 때까지 쓸모없는 기다림을 반복하던 날. 현우보다 더 커지고 싶은 맘에 계절이 변할 때마다 어깨를 딱 붙이고 서서 서로의 정수리를 꾹꾹 누르며 키를 비교해 보다 이제 더는 안 크나 보다 하며 포기했던 날. 먼저 교복을 벗은 현우가 체크셔츠에 늘 한 몸 같던 운동가방을 들고 다른 번호 의 버스를 타던 걸 지켜보던 날.

 

그런 날들의 민혁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들었을 현우가 제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정말로 바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머릿속의 생각들과는 다르게 민혁이 입이 자꾸 멋대로 움직였다. 지금 그 '가끔씩 말도 안 되게 당황하고 붕 떠버린' 최고치의 순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손현우 너 진짜 미친 거 아냐? 그래. ,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냐고."

 

 

민혁은 속으로 천만번 제 머리를 퍽퍽 내리쳤다. 바보, 천치. 너는 진짜 천하제일 못나고 못된 놈이야. 억울해서 돌아버릴 것 같다. 좋아하질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아니지. 좋아한다고 말했어야 됐다. 이 바보 같은 관계덕에 흘러가는 시간 동안 현우가 혼자서 붙잡고 있었을 감정들이 이미 마비 상태의 민혁을 깔고 뭉겠다.

 

 

민혁아, 내가 생각보다 너를 많이 좋아해."

 

 

뭐라고? 안 들려. 진짜 안 들려서 그래. , 현우야. 다시 한번만 말해주라. 민혁은 자기를 덮친 파도에 떠밀려가느라 되지도 않는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아 진작에 수영을 좀 배워 놓을걸. - 소리. 이명인가 싶더니 째깍 째깍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가 민혁의 마비를 깨운다.

이렇게 열받을 수가 없다. 멍청함에 버린 10년이 바닥에 꼬꾸라져 어거지를 피우는데 더 이상은 이것들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다. 제 앞에 현우가 웃는다. 그리고 운다.

 

 

"울지 마, 뭘 잘했다고 울어."

 

""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생채기가 나 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보모라도 된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주제에 괜히 다그치는 말을 뱉는다. 민혁은 끝까지 자기가 바보라는 걸 숨기기로 했다. 이미 다 들킨 것 같지만 아마도 현우는 숨겨줄 것 같으니.

 

 

 

 

[, 뎅 종이 울린다. 끝의 끝, 다시 시작을 알리는 종이.]

 

 

 

 

 

 

 

 

 

 

 

그 난리를 치르고 이틀을 내리 붙어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현우가 정말 그날 작정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 일이 벌어질 걸 다 알았는지 뒤로 이틀이나 스케줄을 빼놨던 것이다. 끝내 스스로에게 분통이 터지고 억울해서 현우를 끌어안고 울었다. 먼저 운 사람 민망하도록 소리 내어, 엉엉. 멋없게 휴지로 코를 몇 번이고 훔친 후에야 진정이 돼서 어찌나 쪽팔렸던지 또 아닌 척을 했고, 현우는 '' 모르는 척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니 꽁무니에 불이 붙은 짐승처럼 급하게 서로를 안고 또 안았다. 처음엔 급한 마음에 일을 치러 사실 뭐가 뭔지 분간이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민혁은 갈증을 참았다. (참았다기엔 낯부끄러울 만큼 휴일이 끝난 다음 날은 오전반 수업이라 이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다는 현우를 끝까지 붙잡아가며 품 안에 가두고 보내주지 않았지만)

 

 

3일 전 집에 들어왔던 모습 그대로 챙겨 입은 현우가 집을 비우자 한순간에 침대가 넓어졌다. 민혁은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이불 속에 얼굴을 숨겼다 꺼내길 반복하며 제 앞에 일어난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려고 용을 썼다. 현우가, 그러니까 손현우가. 내 것이 되었다. 이런 생각 너무 더러운가. 마른 세수를 벅벅 해대는데 비집고 나오는 웃음은 숨길 수가 없고 발끝부터 짜르르- 열이 올랐다 내리길 멈추질 않는다. 이러고 있다간 정말 미쳐버리는 것 아닐까. 민혁은 몸을 일으켜 던져두었던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했다. 띠링- 방전되었던 화면이 사과같은 얼굴을 밝힌다.

 

스스로가 너무 깜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치만 떠오르는 것이 하나뿐이었다. 남의 청첩장 하나때문에 10년간의 견딤을 깨버린 현우가 제 앞에서 그동안의 마음을 답지 않게 조리 있게 말하던 모습을 떠올리다 보니 민혁은 어느새 웨딩 스튜디오를 검색하고 있었다.

 

 

 

 

 

 

 

 

 

 

bell.jpg

 

 

 

 

스튜디오의 간판과 민혁을 번갈아 보던 현우는 진짜로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어이없어했다. ! 여기 갈 거야! 민혁이는 눈에서 목소리가 나온다...라고 생각하는 현우였다.

 

 

"이런 거 데이트로 많이들 한다잖아~~ 우리 첫 데이트 어때! ?!"

 

 

현우의 대답도 듣기 전에 민혁은 팔짱을 낀 채로 스튜디오의 문을 열었다. 떼레렝- 유리문 위에 설치된 종이 울리기가 무섭게 샵 안쪽에서 직원이 나와 인사를 한다. 민혁이 예약 전화를 했을 때 걱정말라며 알아서 준비해둘테니 시간만 맞춰 와달라 했던 그분이었다.

 

 

"주시는 거 잘 입구와! 알겠지!"

 

"아익! "

 

 

턱밑을 긁으면서도 싫지 않은 현우의 표정에 민혁은 현우의 한쪽 엉덩이를 톡 하고 때렸다. 밖에서 주책이야 이 양반. 하며 잔소리를 하듯 현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맞은 엉덩이를 두 손바닥으로 가렸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은 그들에겐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둘은 민망해할 시간도 없이 자연스레 각자의 탈의실로 흩어졌다.

 

 

 

멋쩍은 헛기침 소리에 고개를 들면 탈의실 문에 붙은 전신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턱시도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뒤뚱거리는 현우가 나온다. 아무래도 민망했던지 하고 싶은 말 잔뜩인 눈을 맞추는데 민혁은 파핫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이건 니 꺼보다 더... 이러냐아..."

 

 

민혁이 현우의 등짝과 팔뚝을 이리저리 때려가며 악악 소리를 내고 웃었다. 확실히 제 것보다 더 화려한 턱시도였다. 목 옆부터 이어지는 레이스 천이 신기하게도 반짝거렸고 더블 카라의 아랫단은 하얗다 못해 은빛이 돌았다. 크기는 얼마나 큰지 곧 어깨단에 닿을 것 같았다. 현우가 한 손을 들더니 이내 말아 쥐고 마이크를 입가로 가져다 대고 뻐금 뻐금 노래를 부르는 시늉을 했다.

 

 

"이거 아니냐고오.. 이거..~~!"

 

 

요즘 어머니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젊은 트로트 가수 흉내에 도움을 주던 샵 직원도 입으로 바람빠지는 소리를 낸다. 민혁은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자자~ 신랑 두분 여기 보시고, 예예. 그 약간 떨어져서 서주실게요. 너무 사이가 좋으셔~ 근데 그럼 어좁이처럼 나오니까, 예예~~ 좋아요~~"

 

", 하나둘 셋 하면 찍습니다~! 그 키크신 신랑분! 신랑분은 쫌 더 웃으시고, 작은 신랑분~~~ 신랑분은 네네 좀만 덜 웃으시고~ 이가 너무 보이셔~~~ ~~ 좋습니다~~~김치~~~~"

 

 

버튼을 누를 때마다 터지는 조명에 경직되었던 둘은 사진기사가 너스레를 떨어주는 덕에 진짜 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사진을 찍었다.

 

 

 

 

샵을 나와 평일이라 한산한 거리를 걸으며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에 눈치를 살폈다. 현우도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진 민혁은 몸을 꽉 붙이고 팔짱을 낀 채 얼굴까지 현우의 어깨에 묻었다. 너무 붙은 몸에 둘의 걸음걸이가 흔들렸지만 둘은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휘청이며 걸었다.

 

 

"아이, 이러면 어좁이 돼애~"

 

 

사진기사를 따라 하며 말장난을 치는 현우에 민혁의 입은 곧 꺄- 소리가 날 것처럼 벌어졌고, 현우도 입을 앙다물고 볼따구니를 부풀리며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현우야."

 

""

 

"이제와서 우리가 오늘부터 1일 이런거 하기엔 좀 그렇것 같구."

 

"..."

 

"우리 결혼하자."

 

"..."

 

 

"?!"

 

"언제?"

 

 

바보 같고 웃긴 제 남자친구가 사랑스러워 대뜸 현우의 팔을 든 민혁이 손등을 꽈악 깨물었다. 늘 그랬듯 현우는 으윽 소리를 내면서도 손을 빼지 않는다.

 

 

 

 

 

 

 

 

 

 

 

 

-fin